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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려함 속의 고독 : 드라마 ‘작은 아씨들’ 속 싱가포르 공간 미학

by 킥마 2025. 5. 3.

한편의 드라마가 끝나고도 오래도록 장면이 머릿속에 남는 경우가 있다. 오늘은 화려함 속의 고독, 드라마 '작은 아씨들' 속 싱가포르 공간 미학에 대한 내용이다.

 

화려함 속의 고독 : 드라마 ‘작은 아씨들’ 속 싱가포르 공간 미학
화려함 속의 고독 : 드라마 ‘작은 아씨들’ 속 싱가포르 공간 미학

 

tvN 드라마 '작은 아씨들'은 바로 그런 작품이다. 복잡하게 얽힌 인간관계, 서늘한 정서, 그리고 예측을 빗나가는 전개 속에서 시청자는 마치 미로를 걷는 듯한 긴장을 경험한다. 그런데 그 미로의 마지막 출구, 드라마의 클라이맥스는 익숙한 서울이 아닌 이국적인 싱가포르였다. 예상 밖의 선택이었다. 왜 하필 싱가포르였을까? 이 글에서는 '작은 아씨들'의 싱가포르 로케이션이 어떤 방식으로 드라마의 정서와 연결되었는지, 그리고 그 장소들이 어떻게 심리적 무대를 구성했는지를 살펴본다.

 

싱가포르, 왜 ‘작은 아씨들’의 공간이 되었을까

드라마 ‘작은 아씨들’은 명백히 한국적인 가족 서사와 미스터리 스릴러의 요소를 지녔지만, 그 클라이맥스의 배경은 뜻밖에도 싱가포르였다. 보통 해외 로케이션이라 하면 유럽이나 일본처럼 익숙한 ‘관광지 이미지’가 먼저 떠오르지만, 이 드라마는 동남아시아 도시인 싱가포르를 택했다. 이유는 단순한 ‘해외 배경’이 아니다. 싱가포르는 도시국가 특유의 이질성과 냉정한 질서, 열대성 기후에 어울리지 않게 정제된 도시 설계가 공존하는 공간이다. 이런 면모는 극중 인물들의 냉혹한 이중성, 특히 ‘원상아’라는 인물이 가진 이면과 잘 맞닿아 있다. 고급 호텔과 유리 건물로 대변되는 부의 상징, 동시에 그 안에서 벌어지는 불가해한 인물 간의 심리전은 싱가포르라는 도시가 가진 상징성과 정확히 맞물린다. 드라마 후반부 싱가포르 장면들은 낯설지만 선명한 시각적 분위기를 만들어냈고, 이것이 단순한 배경이 아닌 하나의 ‘심리 무대’로 기능한다. 특히 ‘수페리어 호텔’이라는 가상의 장소를 빌려 원상아가 주재하는 은밀한 세계를 구축한 설정은, 싱가포르 현지의 리얼 호텔과 결합되면서 일종의 ‘현대적인 고딕’ 이미지까지 전달했다.

 

드라마 속 주요 촬영지: 실제 장소의 정체와 분위기


‘작은 아씨들’의 싱가포르 촬영지는 많지는 않지만 극적인 장면에 정확히 배치되어 있다. 그중 가장 인상적인 장소는 드라마 후반부 원상아가 머무는 고급 호텔이다. 이곳은 실제로는 ‘더 세인트레지스 싱가포르(The St. Regis Singapore)’라는 초호화 호텔이다. 극 중에서는 수페리어 호텔이라는 가상의 이름으로 등장했지만, 실제 이 호텔은 오차드 로드에서 도보로 10분 거리에 있는 5성급 럭셔리 호텔로, 예술작품과 대리석 로비, 그리고 외부의 정원 구조가 드라마의 미스터리한 분위기를 강화시킨다. 또 하나 중요한 장소는 마리나 베이 지역의 주변 거리와 고층 건물이다. 실제로 드라마에서 정제된 이미지로 나오는 장면들 상당수가 마리나 베이 근처에서 촬영되었는데, 이는 무표정하고 체계적인 금융 도시의 이미지를 극대화한다. 반면 식물원의 장면들은 싱가포르 보타닉 가든(Singapore Botanic Gardens)에서 촬영되었으며, 자연 속에서 비밀을 이야기하거나 심리적 전환을 암시하는 데 사용되었다. 이곳은 150년이 넘는 역사를 가진 열대식물 정원으로, 울창한 나무와 잔잔한 호수, 그리고 철저히 관리된 조경이 인물 간 대화의 배경으로 등장할 때 묘한 긴장감을 형성한다. 특히 이 공간은 사람의 손길이 닿은 자연이라는 점에서, 통제된 환경 속에서 일어나는 불안정한 사건들과 평행적인 관계를 이룬다. 마지막으로 등장한 골목길은 차이나타운 인근으로 추정되며, 빽빽이 들어선 식당과 좁은 골목, 그리고 어두운 조명이 뿜어내는 분위기는 이국적이면서도 어떤 ‘도망의 공간’으로 기능했다. 현실감보다는 연극적 연출에 가까운 이 공간들은 단순한 도시 풍경이 아니라 캐릭터의 심리 상태를 시각화한 장치로 작용한다.

 

한국 드라마의 해외 로케이션 활용, 그 의미와 한계


‘작은 아씨들’의 싱가포르 장면은 몇 가지 관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첫째로는 단순히 스케일을 키우기 위한 수단으로서가 아니라, 감정의 절정과 서사의 마무리를 담당하는 장소로서 기능했다는 점이다. 흔히 해외 로케이션은 시청자에게 신선함을 주거나 캐릭터의 도피 공간으로 쓰이곤 하지만, 이 작품에서는 오히려 모든 긴장과 음모가 극대화되는 ‘결전의 무대’로서 사용되었다. 둘째로는 미장센과 공간의 심리적 연계를 강하게 시도했다는 점이다. 싱가포르라는 도시는 동남아시아의 열대 기후임에도 불구하고, 지나치게 깔끔하고 완벽한 이미지를 지녔다. 이 점은 원상아라는 인물이 가진 정제된 말투와 감정 없는 얼굴, 그리고 숨겨진 폭력성과 완벽히 일치한다. 셋째는 아시아 도시를 배경으로 한 드라마 로케이션이 점차 유럽이나 미국 중심에서 벗어나고 있다는 지표이기도 하다. 기존의 드라마들이 프랑스나 이탈리아, 혹은 일본의 한적한 거리 등을 배경으로 감정을 환기했다면, ‘작은 아씨들’은 명확한 목적성과 콘셉트에 따라 선택된 로케이션을 활용했다는 점에서 진일보한 사례로 볼 수 있다. 다만 아쉬운 점도 있다. 싱가포르라는 공간이 가진 고유의 문화나 사회적 맥락은 배제된 채, 단지 시각적 차별화와 극적 효과에만 집중했다는 비판은 피하기 어렵다. 드라마 속 인물들은 현지의 사람들과 거의 교류하지 않으며, 도시가 하나의 거대한 세트처럼만 기능한다. 따라서 해외 로케이션이 가진 가능성을 극대화하기 위해서는 향후에는 해당 도시와의 교감이나 사회적 맥락까지 반영한 설계가 더해질 필요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은 아씨들’은 드라마적 목적에 부합하는 싱가포르의 도시미학을 활용해, 시청자에게 기존 한국 드라마에서는 보기 어려운 서늘하고 압축된 공간 감각을 전달하는 데 성공했다는 점에서 중요한 사례로 기록될 만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