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도는 오랫동안 드라마와 영화에서 ‘휴식’과 ‘도피’의 상징적 공간이었다. 오늘은 드라마 '우리들의 블루스' 속 제주의 다큐 같은 풍경들에 대해 이야기할 예정이다.
푸른 바다, 조용한 마을, 느린 일상이라는 이미지가 자주 반복되었지만, 그만큼 상투적인 배경으로 소비되기도 했다. 그런데 2022년 방영된 드라마 ‘우리들의 블루스’는 달랐다. 이 드라마는 제주를 낭만적인 휴양지로 그리지 않는다. 오히려 제주에 뿌리내린 이들의 일상과 고통, 고립과 연대의 이야기를 다큐멘터리처럼 덤덤하게 그려냈다. 특히 실제 제주의 오일장, 해녀 마을, 바닷가 도로와 폐교 등은 극 중 인물들의 감정선을 더욱 구체화시키는 공간으로 기능했다. 단순히 예쁜 배경이 아닌, 이야기 그 자체가 되는 ‘장소’로서의 제주는 어떻게 구현되었을까? ‘우리들의 블루스’ 속 제주의 주요 로케이션들을 따라가며, 그 미묘한 시청각 효과를 짚어본다.
제주시와 서귀포, 서로 다른 풍경과 삶의 질감
‘우리들의 블루스’는 제주의 풍경을 이분법적으로 그리지 않는다. 중심 무대가 되는 곳은 제주시의 오일장 부근과 서귀포시 인근 해안 마을이다. 이 두 공간은 제주 안에서도 상반된 분위기를 가진 장소인데, 드라마는 그 대비를 인물들의 삶에 투영하는 방식으로 활용했다. 먼저 제주시 오일장은 극 중 이병헌, 김혜자, 신민아 등의 캐릭터가 얽히는 주요 배경이다. 실제로 제주 동문재래시장 인근과 자매 오일장에서 촬영이 이루어졌으며, 상인들의 분주한 움직임, 상품이 쌓인 좌판, 협소한 골목의 구조 등은 마치 다큐멘터리 촬영을 보는 듯한 현장감을 준다. 특히 이 시장은 극 중에서 고등학생 아들을 둔 싱글맘이 생계를 유지하는 장면이나, 고향에 돌아온 이들이 삶을 재정비하려는 순간에 중요한 배경이 된다. 이와는 다르게 서귀포 남원읍, 특히 해녀촌과 외진 어촌 마을은 또 다른 인물들의 감정 서사를 담아낸다. 고두심이 연기한 해녀 ‘정은희’의 배경은 실제로 서귀포 해안도로와 남원 큰엉 해안 산책로 일대에서 촬영되었으며, 조업과 물질 장면은 진짜 해녀 마을에서 이루어졌다. 여기에 등장하는 돌담, 폐가, 좁은 골목은 관광지에서 보던 제주의 이미지와 전혀 다르다. 이 공간들은 제주가 가진 역사적 층위, 노동의 풍경, 고립된 노년의 삶을 압축해 드러낸다. ‘우리들의 블루스’는 이처럼 제주의 서로 다른 지역을 인물의 심리와 결합해 서사적으로 활용한다.
장소 그 자체가 감정이 되는 순간들
이 드라마에서 가장 인상적인 점은 공간이 감정을 대변한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 인물이 말하지 않아도 장소가 그 사람의 삶과 마음을 대변한다. 예를 들어 극 중 한수(차승원)가 머무는 외딴 바닷가의 폐교는 실제로 제주 애월읍의 폐교 부지를 개조한 공간이다. 여기는 친구의 죽음을 겪은 한수가 자발적으로 고립되기를 선택한 장소인데, 외풍이 거센 창문, 텅 빈 교실, 녹슨 문틀 등이 캐릭터의 상처를 시각적으로 구체화한다. 이는 일부러 꾸민 미장센이 아닌, 제주의 실제 공간이 갖고 있는 시간의 결을 그대로 살린 사례다. 또 다른 장면은, 영옥(한지민)이 자폐를 가진 동생을 데리고 새벽녘 해변을 걷는 신이다. 촬영지는 제주 용담 해안도로 일대로, 이 길은 공항에서 가까우면서도 무척 조용하고 바다와 맞닿아 있어 일상의 소음에서 단절된 느낌을 준다. 영옥의 복잡한 감정과 바다의 평온함이 대비되며, 말보다 더 강하게 인물의 내면을 전달한다. 이처럼 ‘우리들의 블루스’는 제주의 자연을 단순히 아름답게 소비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날의 날씨, 빛의 농도, 바람의 방향까지 인물의 감정과 정교하게 연결시킨다. 드라마에 등장하는 대부분의 장면은 실제 장소에서 장시간 촬영되었으며, 날씨에 따라 대본이나 콘티가 유동적으로 조정된 경우도 많다고 알려져 있다. 이는 제주의 공간이 단순한 무대가 아니라, 하나의 ‘캐릭터’로 기능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한국 드라마 속 지역 공간 활용의 새로운 기준
‘우리들의 블루스’가 한국 드라마 지형에서 갖는 의미는 단순히 로케이션을 많이 썼다는 점이 아니다. 이 드라마는 제주의 현실과 감정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면서, 동시에 서사적으로 설계된 공간 연출을 조화시킨 보기 드문 사례다. 이전까지 드라마의 지방 촬영은 주로 관광지 위주의 배경 소비에 머무는 경우가 많았다. 예쁜 풍경은 많지만, 인물의 삶과 연결되지 못해 피상적인 인상만 남긴 경우가 대다수였다. 그러나 ‘우리들의 블루스’는 철저하게 인물 중심의 공간 설계를 바탕으로, 실제 촬영 장소와 서사적 맥락을 긴밀하게 엮었다. 오일장의 좌판과 냉장고 소리, 바닷가 폐가의 바람 소리, 골목의 개 짖는 소리 등은 모두 현장 녹음과 실제 풍경을 기반으로 구성되었으며, 이는 사실성과 감정선을 동시에 살려낸다. 또한 드라마는 제주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말투, 복장, 생활 방식까지 사실적으로 반영하며, 공간의 리얼리티를 더욱 공고히 한다. 이런 접근은 향후 한국 드라마에서 ‘로케이션의 서사화’라는 개념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주는 사례가 된다. 관광지가 아닌 일상, 배경이 아닌 인물의 감정을 품은 장소, 정형적 이미지가 아닌 구체적 현실. ‘우리들의 블루스’는 제주의 장소들이 드라마를 구성하는 핵심 서사 요소가 될 수 있음을 증명했다. 더 이상 로케이션은 단순한 미장센이 아니다. 그것은 이야기의 방향을 결정하고, 인물의 운명을 결정짓는 중요한 내러티브의 일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