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에서 배경은 종종 ‘보조적 역할’에 그치지만, 때로는 그것이 이야기의 중심을 이끌기도 한다. 오늘은 드라마 '이태원 클라쓰' 속 서울의 재해석, 이태원, 한남동, 경리단길이 지닌 자기 서사의 공간에 대한 내용이다.
JTBC 드라마 ‘이태원 클라쓰’는 바로 그런 사례다. 이 작품은 주인공 박새로이가 이태원에서 작은 포차를 시작으로 글로벌 프랜차이즈를 꿈꾸는 과정을 담고 있지만, 단순한 창업 서사가 아니라 서울이라는 공간 안에서 부딪히는 계층, 인종, 문화, 그리고 정체성의 문제들을 다룬다. 특히 이태원이라는 공간은 한국에서 가장 이질적인 장소이자 다문화적인 풍경을 가진 곳으로, 기존 드라마들이 잘 다루지 않았던 도시의 얼굴이다. ‘이태원 클라쓰’는 이 공간을 통해 경계에 선 인물들의 분투를 조명했고, 이로써 공간 자체가 주제를 강화하는 방식으로 기능했다. 이번 글에서는 이 드라마 속 이태원, 한남동, 경리단길이 어떻게 캐릭터의 감정과 태도를 담아내는 공간으로 작동했는지를 살펴본다.
이태원, 자유와 충돌이 공존하는 무대
이태원은 ‘이태원 클라쓰’라는 제목처럼 이야기의 중심 공간이다. 일반적인 드라마에서 자주 등장하는 강남이나 홍대와 달리, 이태원은 이방인과 토박이, 전통과 현대, 빈곤과 부유가 충돌하는 공간이다. 이 공간은 주인공 박새로이가 가진 가치관과 맞닿아 있다. 그는 권위에 순응하지 않고, 자신만의 방식으로 세계를 살아가려 한다. 그런 그에게 이태원은 규칙이 다른 장소, 다양한 삶이 공존하는 자유의 상징이 된다. 실제로 드라마 초반, 새로이는 교도소에서 출소한 후 가장 먼저 이태원을 방문한다. 이곳은 그에게 과거와 단절하고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는 출발선이다. 하지만 이태원은 단순한 해방구가 아니다. 오히려 너무 많은 문화와 계급, 언어가 충돌하는 복잡한 장소다. 드라마는 이를 단순한 미장센이 아니라 극의 구조로 끌고 들어온다. 새로이의 포차 ‘단밤’이 위치한 골목은 이태원의 주택가와 상업 공간이 겹쳐지는 지점이며, 상권과 문화의 경쟁이 치열한 곳이다. 이러한 공간적 설정은 새로이의 이상과 현실이 충돌하는 전장을 만들어낸다. 이태원은 그에게 자유를 상징하지만, 동시에 가장 치열한 생존의 공간이다. 그 모순된 이중성이 캐릭터의 성장을 더 입체적으로 만들어준다.
한남동과 경리단길, 전략과 욕망의 지형도
이태원을 중심으로 하지만, 드라마는 한남동과 경리단길이라는 주변 지역도 주목한다. 이 공간들은 극 중에서 인물의 욕망, 전략, 변화를 상징하는 지리적 장치로 쓰인다. 먼저 한남동은 극 중 장가그룹의 본사가 위치한 지역으로, 절대 권력의 공간이자 고급 부촌의 이미지가 덧입혀진다. 새로이가 처음 장대희 회장과 마주하는 장소, 조이서가 자신의 능력을 시험받는 공간으로서 한남동은 철저히 위계와 통제가 중심이 되는 곳이다. 이는 이태원의 자유롭고 다층적인 풍경과 대조를 이룬다. 반면 경리단길은 조이서의 감정선과 맞물린다. 개성과 트렌드를 상징하는 이 공간은 단밤이 확장되거나 변화할 때 등장하며, 새로이의 방식이 조이서의 방식과 충돌하거나 융합될 때의 배경으로 사용된다. 특히 중반 이후 경리단길은 단밤이 첫 번째 성공을 거두는 공간으로 재배치되는데, 이는 드라마가 공간을 통해 인물의 성장 구조를 단계적으로 보여주려는 의도를 반영한다. 실제 서울이라는 도시 안에서 이태원-한남동-경리단길은 지리적으로 인접해 있지만 문화적 지형은 전혀 다르다. 드라마는 이러한 차이를 극 속에서 전략적으로 배치함으로써, 시청자가 공간의 분위기만으로도 인물의 위치와 감정을 파악할 수 있도록 설계했다.
서울의 공간이 말하는 ‘청춘’의 구조
‘이태원 클라쓰’는 결국 서울이라는 도시를 통해 한국 청춘의 현실을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이 드라마가 진정한 힘을 발휘하는 지점은 서울이라는 도시를 고정된 이미지로 다루지 않고, 인물에 따라 전혀 다르게 경험되는 공간으로 풀어낸 데 있다. 이태원은 누군가에겐 해방의 공간이지만, 또 다른 이에게는 낯선 생존의 공간이다. 한남동은 누군가에게 기회의 상징이지만, 또 다른 이에게는 닿을 수 없는 벽이다. 경리단길은 때로는 성공의 출발점이 되기도 하고, 소비주의의 한계로 작용하기도 한다. 이런 공간의 다층적 기능은 드라마가 전달하려는 메시지, 즉 ‘누구나 자신의 방식대로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테마와 맞닿아 있다. 단밤의 성공 스토리는 이태원의 골목에서 시작해 서울의 가장 높은 언덕으로 확장되며, 결국 도시 전체가 ‘박새로이’라는 인물의 감정지도로 재구성된다. 이 드라마가 남긴 가장 큰 의미는 서울이라는 도시를 단순한 촬영 배경이 아닌, 이야기의 구조로 끌어올렸다는 점이다. 한국 드라마에서 공간은 점점 더 이야기 중심의 매개체로 진화하고 있고, ‘이태원 클라쓰’는 그 전환점에 서 있는 대표적 작품이라 할 수 있다.